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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래서 결제가 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결제(Payment)'와 학술적 의미의 '결제(Settlement)'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우리는 물건을 사고 대금을 지불할 때 '결제(Payment)'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행위를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지급' 또는 '지불'이라고 한다.

법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결제는 '채무를 이행하는 방법' 이다. 대개의 상황에서 채무를 이행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지폐는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법이다.

현실에서는 내가 가진 현금을 누군가에게 주지 않고 결제가 이뤄지는 상황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규모가 작고 단순한 경제라면, 개념적으로는 실제 현금을 전달하는 행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대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는지를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기역해야 하며, 언젠가는 주고 받아야 할 채무들이 서로 상쇄될 것이라는 가정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든 대금을 결제할 수 있어야 하며 결제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결제 시스템의 접근성이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면 화폐 기반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는 먼저 제대로 된 결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고, 두 번쨰로 모든 사람이 그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개도국에서 금융 포용(Financial inclusion)을 위한 기술(전자결제)이 선진국에서는 금융 소외(Financial exclusion)의 위험을 높이기도 한다.

결제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대안을 찾을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절도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이라면 무엇으로 지불할지, 어떤 지불 방법을 받아들일 것인지 채권자와 채무자가 결정하기 나름이다. 서로 동의하기만 한다면 채무 청산에 무엇을 이용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모든 돈은 '부채 화폐(Debt money)'다. 다시 말해서 돈은 곧 다른 누군가의 변제 의무를 상징한다. 예를 들어 씨티은행에 예치해둔 나의 돈은 씨티은행이 내게 진 빚,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화폐가 부채의 일종이라면 현금은 누구의 부채일까? 사실 우리 주머니에 든 현금은 발행 당사자인 중앙은행의 부채다. 지폐는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에 기록된 중앙은행의 부채일 뿐이다. 그리고 이 중앙은행권은 시장에서 거래가 가능한 부채로, 우리가 결제할 때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고, 결제받을 때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부채 화폐에는 채무 불이행(디폴트)이라는 본질적인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어떤 (선진) 경제도 부채 화폐 없이 돌아갈 수는 없다.

노트

채무불이행이란 누군가 그 부채를 무효화시킬 가능성이다. 예컨대 한국은행이 더 이상 한국은행권(한국은행의 채무 증서)를 통용시키지 않는다고 선언하면 기존의 화폐들은 그 가치를 받지 못하고 무효화된다.

부채 화폐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는 행위는 결국 그들에게 진 부채를 또 다른 형태의 부채인 '화폐'로 대처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부채를 또 다른 부채로 대체하는 이유는 안정성(신뢰성) 때문이다. 채권자들은 일반 개인에 대한 채권보다는 부도 가능성이 없는 은행(중앙은행)에 대한 채권을 더 선호한다. 그래서 결제와 화폐는 모두 신뢰에 기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기보다는 시스템을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