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러나 사실 돈은 움직이지 않는다
결제는 정보와 밀접하게 연결돼있다. 사람들은 결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흔히 돈을 옮기거나 보내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결제는 실제 돈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묘한 손놀림에 불과하다. 즉 돈은 그자리에 있고 장부에 기록된 내용만 바뀐다.
하지만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며, 여기서는 현금 결제가 그 예외다. 만약 은행 계좌를 갖고 있다면 현금 거래는 ATM에서 돈을 인출하고 당신의 계좌에서 그만큼의 액수가 줄어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결제받은 상품 판매자가 그 돈을 은행에 맡기고 은행 계좌에 그 금액이 더해지면서 끝이 난다. 현금 결제를 제외한 다른 결제 방식에서는 실제로 돈이 이동하지 않는다. 그저 장부 기입에 따라 돈의 소유 기록만 바뀔 뿐이다.
금도 마찬가지다. 금은 대부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각 금괴에는 고유의 일련번호가 찍혀 있다. 금을 사고팔 때 대부분 금괴의 등록 서류를 거래할 뿐이지 금 실물이 오가지 않는다. 금본위 시대에도 대개 금은 장부상으로만 이동할 뿐이었다.
금을 실제로 옮겨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면밀한 수송 계획을 수립해야 하고 엄청난 비용도 감수해야 한다. 장부 기입 방식이 효율적이다.
은행은 이러한 장부 수정을 통한 지불(자금이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약 모두가 동일한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으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 은행에서 내가 당신에게 줄 금액을 내 계좌에서 차감한 뒤 당신 계좌에 더하면 끝이다. 그 '이동'은 한 은행의 원장 안에서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은행을 이용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도 두 은행은 각각의 계좌에서 돈을 빼고 더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 후에 은행들은 서로 간의 지급 금액을 정산(settle)하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지불하는 방법에 따라 은행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정산 과정(Settlement)을 수행하지만, 어떤 방식을 택하건 원장의 내용은 반드시 수정된다. 중앙은행의 원장도 마찬가지다. 모든 시중 은행은 중앙은행에 자산 일부를 맡겨 놓기 때문에 모든 장부들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고객이 은행에 돈을 예치하면 은행은 그 대부분을 다른 고객에게 대출해준다. 은행은 예금 인출을 원하는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데 필요한 현금만을 떼어내어 그 돈은 중앙은행에 예치한다. 은행은 대출자가 빌린 돈을 현금으로 내주거나 대출자의 계좌에 예치해줄 수 있다.
돈을 만들어내는 은행이 제공하는 대출 없이는 현대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숱하게 경험했듯이 이러한 방식은 언제나 호황과 불황을 야기한다. 이에 대한 절충안은 마법을 허락하되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은행업이 엄격하게 규제되고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돈을 만들어내는 능력 덕에 은행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결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지불하는 방식은 나날이 변모하는 중이다. 신기술이 모든 것을 바꿔놓고 있으며 새로운 경쟁 상대들이 전통적인 은행업을 대체할 대안을 내놓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은행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제라는 산업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결제를 하는데 있어서도 은행이 반드시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