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결제가 당면한 세 가지 근본적인 과제
현금 결제를 포함한 모든 결제 방식은 '가치를 이전'하는 행위다. 그리고 여기에는 위험, 유동성, 합의된 결제 수단이라는 세 가지 근본적인 과제가 내재해 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킬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나는 당신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고, 내게 돈이 없으면 나는 당신에게 지불하지 못하며, 서로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결제 방법이 없으면 지불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현금, 카드, 수표, 계좌 이체 같은 표준화된 결제 수단이 필요한 이유다.
위험(Risk)
결제에는 본질적으로 위험이 뒤따른다. 모든 거래에는 누군가가 돈이나 상품을 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 돈을 지불해야 하는 사람에게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수표는 부도날 수도 있으며, 투자자는 이미 채권값을 냈으나 채권이 양도되기 전에 채권 판매자가 파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제 위험(Settlement risk)이다.
돈이 오고가는 결제 과정 역시 많은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돈을 훔치기 가장 쉬운 때와 장소는 돈이 들어가고 나오는 바로 그곳, 그 순간이다.
사기를 당할 위험(Fraud risk)도 있다. 돈을 내는 쪽 뿐 아니라 거래에 참여하는 양측 모두에게 사기 위험이 있다. 가게 주인이 맞이한 고객이 훔친 신용카드나 위조지폐를 사용할 수도 있고, 가게 주인이 고객에게 진품 대신 모조품을 내놓을 수도 있다. 판매자가 물건을 발송했지만 구매자가 돈을 낼 생각이 없거나, 물건이 배송된 후 구매자가 결제를 철회할 수도 있다.
유동성(Liquidity)
결제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종류의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보트와 성은 매우 값비싼 물건이지만, 보트와 성으로 상점에서 결제할 수는 없다. 결제를 하기 위해서는 유동성(현금)이 필요하다.
누구나 지갑에 지폐와 동전 형태를 띈 유동성(현금)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다수 상점은 외화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현지 화폐가 있어야 한다. 채권을 매수하려는 투자자는 충분한 돈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채권을 사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서 통용되는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동성을 보유하는 데는 비용이 따른다. 지갑이나 수시입출금 계좌에 돈을 놓어두면 이자를 거의 얻을 수 없다. 마이너스 금리로 이자 수익이 사라져 버린 일본에서는 특히 그렇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결제 수단(Convention)
지불할 때마다 우리는 결제 수단을 선택하며, 개개인의 선택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결제하고 결제받는가는 내가 선호하는 결제 방법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선호하는 결제 방법과도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결제 수단의 유용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는가에 달렸다. 결국 결제 메커니즘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결제수단은 공유 규범, 공동의 규칙, 법체계, 그리고 암뭄적인 합의 같은 보이지 않는 관습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이 중 일부는 '상대의 단말기가 내 카드를 읽을 수 있는가?' 같은 기술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다. 그 외에 법규도 결제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사람들의 습관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결제 수단을 선호한다.
훌륭한 결제 수단은 위험과 유동성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결제 관례에 잘 스며들어 세 가지 과제를 모두 잘 해결한다.
단, 위험과 유동성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 은행은 마이너스 통장을 제공해 계좌에 돈(유동성)이 없는 상태에서도 결제가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마이너스 통장을 많이 개설해준다면 은행은 돈을 받지 못할 위험, 즉 신용 위험이 커진다. 은행은 마이너스 통장에서 나오는 이자와 수수료를 통해 수익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은행은 마이너스 통장 규모를 우리의 상환 능력에 따라 면밀하게 산정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결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결제 수단이다. 수백만 명의 소비자와 기업, 상점은 매일 서로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며 이를 위한 공동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소매 결제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결정적 다수(Critical mass)가 새로운 관례와 수단을 받아들여야만 실제로 통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결제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결제 혁신이 기존의 관례에 기반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